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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歷史敎育 145輯 (2018. 3. 3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5.10
첨부파일0
조회수
1181
내용

[企劃論文]

 

 

○ 일제 강점기에 대한 수능 문항과 歷史像의 왜소화 (정상우)

 

2018학년도 대입부터 한국사과목의 수능 필수화가 이루어 졌으며, 이에 따라 평가 방식 역시 절대평가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수능 한국사에서 일제 강점기에 관한 문항이 그리는 歷史像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 논문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능에서 한국사가 독립 과목으로 출제된 2005학년도 수능 이래 출제된 일제 강점기에 대한 문항들을 검토하였다.

역사과 교육과정이 3차례 변화함에 따라 수능에서 다룰 수 있는 일제 강점기 관련 문항은 줄어들어 평가할 수 있는 사항이 감소하였다. 더군다나 쉬운 한국사지향됨에 따라 문항의 형태는 지문 1개를 통해 1개의 내용만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다.

문항의 형태만이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문항을 통해 제시하는 역사상은 왜소화되고 있다. 역사과 교육과정이 3차례 변화했지만 이들 교육과정은 모두 지배와 저항이라는 歷史像에 근거해 있었다. 그렇지만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내용 요소가 감소함에 따라 지배와 저항외의 당시의 모습을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은 사라졌으며, 수능에서도 그러한 문항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지배의 역사상과 관련해서는 특정한 식민 통치 정책이 시행될 당시의 사회 모습을 질문하는 문항이 다수 출제되는데 이는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서 지배 권력을 과대평가하게 될 우려가 있다. 저항의 역사상과 관련해서는 근대 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항이 사라지고 오직 민족 저항으로서 독립 운동 관련 사항만이 남게 되었다. 그나마도 독립 운동의 분화와 관련된 문항들은 사라진 채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 사항이 더해지며 저항의 역사상도 왜소화되었다.

 

 

 역사교육의 집단기억 만들기와 개인 사이의 간극: 인터뷰 분석 (설배환)

 

본고는 5인의 불특정 개인비공식 피담자 1인 별도 존재을 심층 면담한 내용으로부터 그들이 역사·역사교육의 내용을 수용하고 상기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5인의 통행인과 1인의 비공식 피담자는 그 인지 수준과 긴밀 정도를 달리하면서 집단기억과 연결돼 있었다.

집단기억은 국가 통합과 민족 정체성 확립을 목표로 역사교육이 설계한 것이었다. 집단기억은 머나먼 과거로부터 현재로, 자아로부터 국가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된 집단 자아를 설정하고 있다. 그 안에서 역사·역사해석의 다원성과 불연속성은 종종 간과된다. 일방향의 주입식 교육은 국가 정체성의 집단기억을 강화한다. 통합된 단일 집단을 목표하는 국가의 理想은 개인들에게도 유효한 점이 있다. 결국 집단기억의 오류와 배타는 논의의 대상에서 종종 비켜 서 있다.

그런데 개인들은 반드시 역사교육의 수동적 수용자로 머물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역사교육이 제공하는 집단기억을 능동적·수동적으로 자기화한다. 개인기억은 역사기억·집단기억에 비해 분량이 현저히 적고 비연속적이었다. 피담자들이 별다른 직접적 체험과 지적 탐구 활동 없이 학교교육을 통해 얻는 역사지식은 대부분 기억 밖으로 소환되지 않았다. 집단기억에 대한 개인들의 망각과 회피는 공적 담론의 을 벗어난 개인의 자율성의 한 표현이자, 집단기억의 강압을 향한 일상의 소극적 저항일 수 있다.

 

 

[論文]

 

 

 테오도르 몸젠의 자유주의 문제와 역사교육

- 율리우스 카이사르 관련 서술을 중심으로 - (김창성)

 

역사교육은 역사학의 성과나 역사연구자의 업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고대로마사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의 하나이며 노벨상을 수상한 테오도르 몸젠의 역사서술이 진작 역사교육의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어야 할텐데, 이제야 연구된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렇지만 최근 몸젠의 역사서는 다시 주목받고 있으며 여러 나라의 언어로 재간되고 있으며 독일어 본은 최근에도 간행되었다. 이런 관심의 증대는 그를 역사교육의 중요한 이정표로 간주하는 것이 늦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몸젠의 로마사를 읽고 특히 그가 살았던 19세기와 20세기초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하나의 인간임을 발견하였다. 슐리스비히 홀스타인 출신으로서 주류사회에 들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살아야 했고, 나아가 자유주의 사상은 그가 처한 독일사회와 제국주의 앞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특히 로마사 5권에 나타나는 카이사르에 대한 그의 숭배태도는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런 관행은 오래된 것으로 민족국가의 운명을 중시하였던 독일 학계의 자연스러운 동향이기도 했다. 역사학자는 이처럼 민족이나 시대의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를 통해서 알게된다.

그렇지만 그의 사관을 검토한 결과 그는 생각보다 자유로운 학풍을 가지고 비교사를 서슴없이 시도하였다. 이는 그의 자유로운 사고를 보여준다. 아울러 그가 카이사르에 대한 찬사를 보낸 것은 단순히 그것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가들을 비판하려는 동기가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요컨대 그가 고대 로마사를 연구한다고 해서 그것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비판의 자료로서 특별히 카이사르를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사례를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는 일과 같은 교훈의 역사는 부정하면서 단지 개요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하면서 역사의 오용을 경계하였다.

이처럼 인물을 통하여 현실 정치가를 비판하고, 역사의 오용을 두려워하고 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우리는 테오도르 몸젠을 역사교육자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결코 자유주의를 저버린 것이 아니며 역사교육의 문제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졌던것이다.

 

 

 중학교 역사교과서 속 고대 목간 자료의 검토와 활용 (정선화)

 

본고에서는 2007 개정 교육과정부터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수록되기 시작한 고대 목간에 주목하여 서술 현황을 연구하였다. 2000년 이후 새롭게 달라진 역사교과서의 특징 중 하나는 역사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가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수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학계의 연구 성과가 역사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본문의 서술내용과 목간 자료의 연관성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등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역사교과서에 관한 연구는 서술내용이나 지도 등의 삽화자료를 분석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고대 목간과 관련된 역사교과서 분석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목간은 형태가 있기 때문에 시각 자료로도 분류할 수 있지만 문자가 기록된 문자자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간에 남아 있는 문자를 통해 고대의 시대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록된 문자는 당대 고대인들이 직접 작성한 것이므로 문헌자료에서는 알 수 없는 고대사의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고대 목간 관련 서술현황을 분석한 결과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서술상의 문제점과 함께 개선 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첫째, 목간의 정의와 용도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거나 소략하다. 목간은 신출자료이기 때문에 학습자에게 그 정의와 용도가 정확히 전달되어야 한다. 둘째, 교과서에 소개하는 목간은 대체로 현재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없는 목간이 선택될 필요가 있다. 역사교과서에는 異見이 있는 史實은 반드시 이견을 함께 기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교과서의 본문 서술과 연관된 목간 자료를 수록하는 것이 학습에 효과적이다. 1차 사료로서 목간의 가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해당 목간이 본문의 주제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목간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기재하여야 한다. 기타, 목간에 묵서된 글자가 선명한 목간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묵서된 글자나 번역문을 캡션을 통해 기재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는 학습자가 목간의 용도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목간은 고대인들이 기록한 문자자료이다. 따라서 목간에 기록된 문자를 읽고 의미를 파악하여 목간의 용도를 알게 된다면 그 목간이 역사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고려말기 伴當의 기원과 성격 (임형수)

 

伴當은 고려말기에 새롭게 등장한 일종의 私兵으로서 사례에 따라 伴?, 또는 伴人이라 표기되었고 명칭을 풀이하면 동반하는 무리를 의미한다. 그 기원은 12세기 몽골 사회의 自由民 戰士인 누쿠르(那可兒)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누쿠르는 자기 의사에 따라 首領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평소에는 수령과 같이 지내면서 護衛家務에 종사하였고 전시에는 戰士이자 指揮官으로 활동하였다. 이것이 元代漢兒言語로 옮겨지면서 伴當이라는 漢字語로 재탄생되었고 13세기 후반에 麗元關係가 밀접해지자 자연히 고려에도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 반당은 恭愍王代(13511374)부터 내외 정세의 혼란이 가중되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대개 品官士人鄕吏 등의 신분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중앙의 高官에게 의탁하여 호위를 담당하거나 지방의 將帥에게 직속되어 軍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반당은 倭寇 토벌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을 뿐 아니라 잇따른 政變 속에서 사병과 같이 권세가의 무력 기반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반당에 대한 연구는 주로 조선시대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고려시대의 경우 書頭에서 간단히 언급되는 정도에 그쳤는데, 본고는 각종 문헌을 통하여 고려말기 반당의 기원과 활동 등을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 재조명해보려고 하였다.

 

 

 경계는 분리하고, 자연은 연결한다!”

: ‘생태학적 기억의 장소로서 독일 그뤼네스반트 (고유경)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탄생한 그뤼네스반트는 분단과 통일의 독일 현대사를 증언하는 기념물이자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생태서식지 중 하나로서 오늘날 그 의미를 더해가고 있는 생태학적 기억의 장소다. 그뤼네스반트 운동은 국가와 민간의 협력과 갈등으로 이루어진 독일 환경운동사의 전통에 서 있으며, 동시에 유럽 그린벨트 성립의 동인을 제공한 초국가적 환경운동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뤼네스반트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례로 보인다. 독일 그뤼네스반트는 분열과 죽음의 공간이었던 옛 철의 장막의 상흔을 지우고 화합과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또한 그것은 자연보호의 대의를 통한 유럽 연대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뤼네스반트는 분단의 역사와 통일의 과제를 공유하고 있는 한반도의 미래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뤼네스반트 운동을 주관하는 BfN과 비무장지대라는 교집합을 갖는 경기도가 2012년 상호협력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이 주제가 갖는 지구적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뤼네스반트는 민족적 기억과 유럽적 기억, 지구적 기억이 교차하고 중첩되는 생태학적 기억의 장소다.

 

 

[批評論文]

 

 

 조선후기 李鍾徽 東史고조선속의 史實理解 (이경식)

 

조선후기 유자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조선 특히 단군조선에 관해 그 사실이해를 네 부면에서 확고히 하고 있었다. (1) 단군조선에서 삼국에 이르는 승계과정을 밝혀 찬술하면서도 자신의 역사이해가 완벽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뒷날 학술이 더욱 발달 진전하여 후학 후진들이 새롭게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자료 및 활용태도). (2) 중대한 일은 그 자취가 어슴푸레 하더라도 살피고 추정하여 역사상을 끌어내어야 하되, 이 작업은 자기의 역사는 물론이고 남의 역사를 잘 이해하여야 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 두 가지 점은 역사는 역사의 사실 및 선택과 결부되어 인식되고 서술되는 만큼, 이 선상에서 그 지향 및 제시가 확연해야 사적이 해득될 수 있다는 사실(史蹟의 解得料量), (3) 이러한 역사 진행의 動力은 正德 利用 厚生이 계속하여 이어지고 발전하는 데 있으며, 그 가치와 힘은 德 功 言으로 구현되고 전해진다는 것(歷史의 動力과 그 標準), (4) 이상의 사실이해에 입각하여 본 역사찬술을 완수하기 위한 최선의 방도로서 紀傳體로 엮는다는 것(編史設計와 體裁) 등이다. 그는 유자이면서도, 위와 같은 사실이해 찬술자세는, 朱子類의 通鑑型 綱目法과 다르고 성리학식의 正統論 道統觀과도 간격이 크다. 

 이종휘는, 이러한 사실이해를 바탕으로, 단군조선의 역사와 문명이 부여 예맥 및 기자 마한으로 이어짐으로써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단군 기자 마한과 종족과 문물을 함께하게 된다는 三國觀을 정립할 수 있었다. 아울러 민인과 더불어 疆域에서도 만주와 한반도는 하나로 묶여 일관되게 그 신축사정을 역사정황에 근거하여 추구하고, 이를 地誌 차원에서도 간명하게 지목할 수 있었다.  

 

[附錄]


 제60회 전국역사학대회 역사교육연구회 분과 발표 참관기
“역사전환기 역사교육의 방향” (천세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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